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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옥 형님 산 이야기~

ropeman 2007. 10. 19.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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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클라이머의 삶] 동상의 상처 극복해낸 히말라야니스트 유동옥씨
“산은 젊은 날 열정 마음껏 구가했던 곳”

“학교 1년 후배이자 친구의 사촌동생인 한정수(하켄클럽·고인)를 통해 인수봉을 알게 되고, 자누클럽 전호걸 선배를 통해 선인봉을 알게 되었답니다. 인수봉엔 A나 B코스, 선인봉에는 박쥐길, 남측 십자로, 뜀바위 코스가 고작이던 시절이었죠. 그래도 어찌나 재미있던지 토요일에는 가방에 책 대신 자일을 넣고 학교에 갔다니까요. 교복에 단화 신고 바위를 타기도 했으니까 말이죠.”

재수를 거쳐 67년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산을 향한 열정은 좀체 식어들지 않았다. 끼리끼리 몰려다니다 보니 한계를 느낀 유동옥은 인사를 나누며 지내던 이들을 끌어 모았다. 이렇게 박만익, 김성국, 박영배, 정범진-범채 형제 등 7명이 모여 69년 이른 봄 발족한 모임이 크로니산악회다.

“크로니(crony)는 친구란 뜻이에요. 산도 산이지만 좋은 사람끼리 모인 모임이라는 성격이 더욱 강한 거죠. 인수 최장의 루트인 크로니길도 우리가 만든 거고요. 창립 기념 개척 코스인 셈이죠.”

아쉽게도 유동옥은 길을 내는 데 참가하지는 못했다. 69년 가을 개척 가능성을 타진한 뒤 70년 초부터 3년간 군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73년 제대 후 다시 불이 붙었다. 그 동안 인수봉에 등반로가 여럿 생겨났지만 휴일이면 만만한 루트에 클라이머들이 몰리다 보니 마음에 드는 길을 오르려면 기다려야할 적이 많았다. 눈을 돌렸다. 백운대 남면이었다.

“세 개쯤 냈어요. 대부분 크랙 루트지요. 사실 난이도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크랙에 박힌 돌과 흙을 긁어내고, 잡풀과 잡목을 뽑아내는 일이 힘들었지요. 아무튼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오른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이고 흥분되는 일이랍니다. 간혹 흩어진 회원들의 힘을 모을 수 있는 좋은 계기도 되고요.”

크로니산악회는 창립 직후 하루재 부근과 깔딱고개 밑에 샘을 파놓기도 했다. 깔딱고개는 휴식년제 실시 이후 물길이 사라졌고, 하루재 부근의 크로니샘은 수질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폐쇄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북한산 계곡물이 맑던 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는 클라이머뿐 아니라 도보등산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제가 끝까지 마무리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적벽 개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답니다. 좋은 데 있는데, 한 번 가보지 않겠냐는 후배의 말에 솔깃해 따라갔다가 등반한 벽이었죠. 각이 어찌나 센지 출발지점부터 몸이 벽에서 떨어지더군요. 74년부터 3년간 매년 시도했는데, 76년 하계등반 때 2피치 위의 오버행을 진입하다 접어버렸습니다.

아 글쎄 크랙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크랙 안에서 새카만 눈동자 두 개가 나를 빤히 바라보지 뭐예요. 질겁했죠. 그 바람에 잡았던 크랙을 놓쳤고, 그 충격으로 겹쳐 박아놓았던 나이프가 빠지면서 추락하고 말았고요. 확보 보던 후배가 한 번 더 해보라고 권했지만, 그만두겠다고 말하곤 내려와 버렸죠.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크랙 안에 있던 게 뱀인지 뭔지. 아무튼 그때는 정말 놀랐답니다.”

그 이태 뒤인 78년 유동옥씨가 안나푸르나에서 돌아와 동상 치료를 위해 병상에서 지낼 때 후배들이 완성시킨 적벽 크로니길은 기술과 장비 모든 게 열악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우리 등반사를 한 단계 끌어올린 루트라는 게 산악계의 평이다.

안나푸르나 원정은 산친구인 고 김항원씨(크로니)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73년 알프스 샤모니의 프랑스국립스키등산학교에서 빙벽등반 연수를 받고, 75년 안나푸르나 정찰등반을 다녀온 김항원씨는 유동옥씨에게 한국산악회 입회를 권했다. 본 원정에 나서려면 한국산악회 회원이 필수 자격이기 때문이었다.

김항원씨의 말대로 한산에 가입하고 원정대에 지원했지만, 최종 대원에 선발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서울 지역에서 최고로 꼽히는 클라이머들은 물론, 전국 각 지부에서 내로라하는 클라이머들이 모두 지원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말 등반의 강도를 높이고, 평일에는 헬스장을 찾아 힘을 키웠다. 2년간의 고된 기간이었다. 그래도 흰 산을 떠올리며 강도 높은 훈련을 이겨냈다.

“77년 1월 1275m봉 동계등반도 했답니다. 어쩌면 겨울시즌 첫 등반일지도 모르겠네요. 김재근(한국산악회 실버원정대 훈련대원), 신승모(미국 브리지포트 대학 교수)와 함께 셋이서 올랐죠. 어찌나 추웠는지 젤트 안에서 오돌오돌 떨며 비몽사몽간에 지냈고, 벽등반을 끝낸 뒤 설악동에 내려가서는 발가락에 동상 걸렸다고 난리들을 쳤답니다. 여관방에 들어가 물을 덥혀 발을 담그고 하룻밤을 지냈으니까요. 정말 열심히 훈련했던 것 같아요.”

유동옥씨가 훈련 중일 때는 살을 에는 듯 추웠지만 마른 겨울이었다. 그런데 하산 직후 눈이 퍼붓기 시작했고, 쌓이고 쌓인 눈이 77에베레스트 훈련대원들을 덮치는 바람에 3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2년간의 훈련기간 동안 등반 대상지는 안나푸르나1봉에서 4봉으로 바뀌고, 대원수는 12명에서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유동옥씨는 끝내 원정에 참가했고, 그로 인해 평생 씻을 수 없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적벽 크로니길은 제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완성되었답니다. 후배들이 크로니길을 마무리하러 간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답답했답니다. 내가 마무리지어야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루트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안나푸르나 원정에 나선 것에 대해 후회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후회할 거라면 아예 가지도 않았을 거고요.”
유동옥씨는 걷는 데 큰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게 되자 다시 산을 찾고, 바위도 탔다.

“한동안은 다섯 발가락 모두 없는 오른발은 암벽화 안쪽에 헝겊을 채워넣곤 했지만 몇 년 지나 절단부위가 어느 정도 아무니까 가만히 놔두지 않더군요. 뜨거운 모래밭을 걸으면 좋다며 친구들이 속초 앞바다로 데리고 가선 모래밭에서 걷게 하고…. 그리고 끝났겠어요, 당연히 술판으로 이어졌지. 아무튼 한동안 절개부위의 감각을 죽이겠다고 홍두깨로 후려치기도 했지만 이태쯤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통증을 느끼지 못해요. 지금은 왼발에 맞는 암벽화를 그냥 신어요. 한창 때처럼 앞장서 오르지는 못해요. 대개 중간에서 바위를 타죠. 그래서 ‘중간맨’이라 불린답니다(웃음).”


“이제 산은 삶 자체예요”

유동옥씨는 사고 이듬해부터 산에서 사랑을 키운 박향련씨(51·이대 문리대 산악부 OB·데레사여고 교사)와 80년 결혼하고, 86년 이후 부산에서 살고 있다. 교사인 아내 따라 옮기게 된 제3의 고향이지만 부산에서도 그는 산 열정은 좀체 식지 않았다. 청웅대(靑雄臺)라는 산꾼들의 모임을 만들고, 금정산을 비롯해 부산 주변의 산을 찾고, 한두 달 간격으로 크로니산악회 산행을 위해 서울을 오가며 환갑나이가 낼모래인데도 식지 않는 산 열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부산도 산 다니기 좋아요. 특히 금정산은 걷기도 좋고, 바위 탈 데도 많아요. 부채바위 부근에 가면 전용 야영장도 있답니다. 산행 마치고 온천장에서 목욕한 다음 한 잔 하는 맛도 쏠쏠해요. 산도 좋지만 사람이 좋아서 계속 산에 다니는 걸 거예요. 10대 중반부터 이어온 인연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으니까요. 악돌이(본지 박영래 객원기자)도 그 때 멤버라니까요.”

유동옥씨는 “가난하고 고민 많던 젊은 시절 산은 안식처이자 분출구였고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은 상태에서 젊음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몫이 더욱 커져 이제는 삶의 터전, 삶 자체”라고 말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바위하다 보면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게 느껴질 적이 자주 있다”며 “그래서 운동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공암벽에도 매달리곤 했는데 얼마 전에는 팔꿈치 인대를 다쳐 제대로 못하고 지낸다”고 했다.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봐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걸 보면…. 큰딸은 호주 유학 중이고, 둘째 딸은 대학 다니느라 집을 떠나 있어요. 부산 집에는 저와 아내 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산친구들에게 애착이 더욱 가는가 봐요. 올 겨울 열심히 운동해 내년 봄이나 여름엔 적벽에 가볼까 해요. 2000년에 마음을 먹었었는데, 마침 속초공항에 예약해놓은 부산행 비행기 시각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답니다. 내년엔 꼭 해봐야죠. 크랙 안에 까만 눈동자 굴리던 놈들이 아직 있는지도 궁금하고요.”